메디치 신간지금, 비스마르크에게 현실정치와 평천하의 길을 묻다

관리자
202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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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스마르크>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


비스마르크가 활동한 19세기 중후반 유럽의 ‘키 플레이어’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로이센까지 6개 국가였다. 21세기 초반의 키 플레이어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북한 등 6개 국가다. 국가의 숫자가 비슷한 것보다는 대립과 통합, 연대와 배제, 합종과 연횡의 상호 역학 관계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유럽의 승자가 자연스레 세계의 패자霸者로 인정받았다면, 21세기 동아시아의 승자가 세계의 패자에 가까운 점도 주목할 점이다. 동아시아의 정치인들이 비스마르크로부터 채택할 점은 무엇일까?

비스마르크는 흔히 독일 통일을 이룬 철혈재상이라 불린다. 당시 유럽의 3강인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독일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독일어권의 또 다른 유력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자국 중심의 통일을 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틈을 뚫고 프로이센 중심의 소小독일 통일을 달성했다. 국력의 상승과 함께 현상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책은 통일에 이르는 철혈의 길보다 경제, 사회, 군사의 성장 속에 어떻게 평화를 만들고 지키는지에 관한 평천하平天下의 방략에 가깝다. 비스마르크는 통일 후에도 최소 20여 년 동안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유럽의 평화를 지켰으며, 통일 전이나 후나 적을 최소화하고 동지를 최대화하는 외교의 진수를 보여줬다. 사실 그가 수상으로 있던 30년 동안 주도적으로 치른 전쟁은 1864년의 대對덴마크 전쟁, 1866년의 대 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의 대 프랑스 전쟁 딱 세 번뿐이다. 다만 그는 언제나 전쟁을 불사하는 듯이 보이려 노력했다.

1862년 비스마르크가 47세의 나이로 프로이센의 수상 자리에 올랐을 때 그가 이 자리를 30년간 지킬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족과 봉건 영주의 진짜 악당’, ‘비굴한 향토 융커’가 당시 베를린 정치권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비스마르크 본인은 ‘운명의 별’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별의 시간을 자신했다. “할 일은 태산이고 잠을 충분히 못자 피곤하지만 모든 것이 시작은 어렵잖소. 신의 도움으로 더 나아지게 된다면 정말 좋겠소. 다만 진열장 접시 위에 오른 것 같은 생활은 좀 불편하네.” 수상 공관 입주 며칠 전 부인 요하나에게 보낸 편지다.

비스마르크는 수상직을 시작했을 때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보여줬다. 그 유명한 ‘철과 피’ 연설은 이 외교의 달인에게도 풋내기 시절의 순진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말과 표 대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말과 표 대결은 1848년과 1849년의 위중한 실수였습니다. 우리의 결단은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 합니다.” 취임 첫해 예산 국회에서의 연설은 지금까지도 따라다닌다.

 

프로이센 정치를 책임지는 자리를 맡았을 때, 비스마르크는 독일과 유럽에서 프로이센의 권력 위상을 어떻게 구축할지 ‘종합 계획’을 가졌을까? 이 계획이라는 것이 ‘어떤 단계를 밟아야 하겠다는 정밀한 구상,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프로이센의 권력을 키워야 하겠다’는 뜻이라면, 이 물음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오히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국가와 왕정의 권력을 키우고자 하는 최상의 목표를 기준으로 그때그때 주어지는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기회 포착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늘 전략적 목표를 염두에 두고 대단히 유연하면서, 다양한 조건을 열어놓는 방법을 구사했다. 전략적 목표의 명확함과 방법의 유연함이라는 특징은 1862년에서 1866년까지 치열했던 ‘독일의 주도권 다툼’에서 그가 보여준 일관된 자세이다. (119쪽 ~ 120쪽)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부국강병을 추구한 비스마르크, 그는 프로이센 국가의 권력을 키우는 전략적 목표만 추구했다. 대개 상대 국가들이 먼저 실수를 범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1863년 주요 연방으로 구성된 ‘주권국가 대표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보하는 개혁안, 대大독일주의적 통합안을 시도했으나 비스마르크의 물타기 전술에 말렸다. 오스트리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 3가지를 역제안하자 회의는 사실상 유회되었다. ‘적이 여론을 업고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해오면 무조건 거부하지 말고 역제안을 통해 빠져나오라.’ 현대 외교와 정치에서도 이따금 목격되는 교훈이다.

그의 두 번째 수인 ‘치고 빠지기(Hit and Run)’는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며 궁극적으로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 지역을 프로이센의 영토로 만드는 과정에서 구사되었다. ① 전쟁을 통해 덴마크를 치고 ② 외교를 통해 오스트리아와의 독일권 양강 체제가 대세라는 인식을 굳히고 ③ 슐레스비히 지역은 프로이센에 인접한 점을 활용해 자국의 영토로 만들고 ④ 라우렌부르크 지역은 오스트리아에게 돈을 주고 양보받았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외교정책의 중심이 없었다. 정책의 중심을 잃고 실리마저 잃은 오스트리아에서는 곧장 프로이센 강경론이 급부상했다. 오스트리아는 ‘검으로 대결해보기 전까지 명예와 권력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며, 그동안 쌓아온 위상에서 절대 밀려나지 않는다’는 강경론을 최종 채택했다. 전쟁은 1866년 6월 중순부터 시작돼 7월 3일 쾨니히그라츠 전투로 사실상 끝났다. 비스마르크는 쾨니히그라츠 승리 후 바로 오스트리아에 회담을 제의해 7월 26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40일 만의 평화협정. 오스트리아가 우려하던 추가적인 영토 할양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느슨하게 유지되던 독일연방의 해체를 받아들이게 했다. 여기서 비스마르크의 세 번째 교훈이 등장한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빨리 끝내라!’

비스마르크가 이 전략을 구사한 것은 적과 동맹이 쉼 없이 교차하는 변화무쌍한 유럽의 정치 기상도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와 알렉산드르 2세의 러시아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다가 신흥 강국 프로이센의 등장에 개입할 틈을 잃고 말았다.

1870년의 대 프랑스 전쟁은 이러한 교훈들이 복합적으로 등장하는 국면이었다. 프랑스가 뒤늦게 룩셈부르크를 탐내자 비스마르크는 외교로 대응했다. 프랑스의 욕심에 반발해 프로이센 국내가 들끓었지만,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명예롭게 피할 수 있다면 전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승리의 기회가 보이는 유리한 순간이 대전을 치를 정당한 근거는 아닐세”, “이 전쟁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할 거야. 한번 불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을 걸 알거든.”

19세기는 알다시피 ‘국민국가(nation state)’의 절정기다. 유럽 각국의 정치와 외교를 지배한 것은 국민 정서였다. 신문과 전보가 발달하기 시작해 국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지금의 인터넷만큼은 아니지만, 전보다 매우 빠르게 제공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기다렸다. 어쩌면 그의 승리 요인은 바로 이 점일지 모른다. 국민 정서로 외교나 전쟁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

위에 인용한 ‘한번 불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을 걸 알거든’, 이 구절은 바로 프랑스 국민의 정서, 프랑스 민족주의를 경계한 표현이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전쟁없이 자신의 유일한 전략적 목표인 독일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양국 국민 간의 감정 대립이 오래도록 계속될 것임을 누구보다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대 프랑스 전쟁은 비스마르크의 네 번째 수, ‘먼저 싸우자고 하는 나라가 되지 마라’가 잘 구현된 사례다. 호전적인 국가로 인식되면 국제 외교가에서 평판을 잃는다. 수십 개 나라의 국경선과 이해관계가 물려 있는 상황에서는 끝까지 먼저 총을 뽑지 않는 나라가 지지를 좀 더 얻을 수 있다. 어차피 순도 100퍼센트의 옳고 그름은 없는 무대에서 이는 중대한 자산이다. 다만 이 전략은 충분한 군비軍備와 속사速射에 자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몰트케가 그 역할을 했다. (비스마르크 수상 역임 1862~1890년, 몰트케 육군참모총장 역임 1857~1887년)

충분히 강한 힘을 갖추고서 예방전쟁, 또는 선제 전쟁을 거부하는 자세야말로 비스마르크가 제시하는 최고의 승리 비결이다. 그는 내면의 목표에 함몰되지 않았다. 국민 정서를 외치는 것이 전쟁과 평화의 현명한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패를 보이지 않고, 어쩌면 패를 결정하지 않고 여러 경우에 대비해 상황과 판단이 무르익을 때까지 인내했다.

비스마르크가 소독일주의에 입각해 오늘날까지 형태가 유지되는 독일권 통일(오스트리아를 제외한)을 이루자 독일은 중동부 유럽의 유일 강국이 되었고, 도전자 신분에서 챔피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가 수상으로 있는 20년 동안 독일은 힘을 가진 자에게 따라붙는 근육 과시의 충동에는 휘말리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 적의 공격이 예상된 양상에 대비한 선제공격을 1870년 이전처럼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수상 재직 말기인 1887년 제국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나중에 불가피해지지 않을까 해서 치르는 전쟁, 나중에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건 아닐까 염려해서 치르는 전쟁은 나와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철저히 거부해왔다.”

물론 앞서 얘기한 대로 군비와 속사의 준비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불안은 (적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이 쉬워 보일 때 커지며 전쟁이 어려워 보인다면 사라진다. 우리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전쟁은 일어나기 어렵다”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 비스마르크는 이웃 나라의 체제도 이용했다. 1871년 이후 그의 외교 철칙 1번은 프랑스 고립화였는데, 그런 프랑스가 공화정인 것을 은근히 즐겼다. “프랑스 공화국은 우리를 상대로 싸우기 위한 왕조를 동맹으로 얻기 매우 힘들다.” 그가 주도해 이루어진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간의 삼제 동맹은 적과 자신의 체제상 차이점을 잘 활용한 역작이다.

독일 통일 이후 그가 가장 신경 쓴 나라는 러시아였다. 중부 유럽의 평화를 깰 수 있는 나라는 서쪽의 프랑스, 동쪽의 러시아였다. 해양 국가 영국은 아직 프로이센의 군사력이 위험수위를 넘었다고 판단하지 않았기에 대륙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브루크와 베를린의 불화 속에서 그가 꺼낸 카드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이었다. ‘통일 전쟁의 적국’을 ‘동맹 중의 동맹’으로 변모시켰다. 키워드는 독일어권 국가 간 친선을 통한 러시아 견제였지만 동력은 비스마르크의 현실주의적 상상력이다. ‘한쪽이 러시아의 공격을 받을 때 가용할 수 있는 군사력을 모두 동원해 서로 돕는다’는 내용으로 비밀 방어동맹을 맺었다. 여러 친구 중에 진짜 친구를 다시 설정하는 섬세함이다. 그것도 불과 십여 년 전의 적국을 상대로.


비스마르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사회보장 정책의 적극적 채택이다.

 

“질병, 사고, 상해, 노년 등에 따른 생활고를 덜어주고자 전국 차원에서 도입하기로 한 첫 번째 사회보장제도는 독일제국을 ‘전 세계에서 사회보장의 최신 체계를 발전시킨 선도 국가’로 만들어주었다고 게르하르트 리터는 평가한다. 사회복지법안의 입법이야말로 비스마르크가 국내 정치에서 이루어낸 가장 중요한 성과라는 평가는 틀린 게 아니다. 그가 이 법안을 책임지고 주도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213쪽)

 

이념은 때에 따라 성립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이념의 해체기에 보수 정치인이 사회복지를 받아들이거나(비스마르크), 평화 외교를 펼 때(리처드 닉슨, 헨리 키신저 중국 수교) 효과와 파장은 배가된다. 진보 정치인이 시장주의를 받아들이거나(토니 블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질서(김대중 IMF 권고안 전면 수용, 노무현 이라크 파병)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국민이 이념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일 때 결단이 돋보이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신념은 보수주의나 통일의 완성에 있지 않았다. 현실만을 믿었다. 그가 ‘현실정치(Realpolitik)’의 완성자라 불리는 이유이다.

 

인간 비스마르크는 잦은 질병과 고독에 시달렸다. 수상에 취임한 지 10년쯤 지나 오랜 친구인 알브레히트 폰 론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측은하다. “이 관직이라는 게 오래 하면 할수록 나를 포위하는 외로움이 더 커지는군. 옛 친구들은 죽거나 적이 되고, 새 친구는 더는 얻을 수 없네.”

자신이 모시던 황제 빌헬름 1세와 죽음으로 헤어지고 그의 손자 빌헬름 2세에게 축출된 후 의 문필, 언론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원래 말과 글에 뛰어났다.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는 베를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뒤 빅토리아 여왕에게 고했다. “그는 몽테뉴가 글을 쓰는 것처럼 말하더군요.” 비스마르크는 퇴임 후 글을 통해 은퇴한 정치인의 새 활동 영역을 개척했다. 《회상록》 1, 2권은 독일에서만 수십만 권이 팔린 당대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다.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 국내 매체에 연속적으로 익명 또는 실명의 기고, 때에 따라 정보와 시각을 언론에 흘리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황제와 불화해 퇴임했지만, 후임 정권에 대한 지도 감독은 놓지 않았다.

《지금, 비스마르크》는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19세기 독일 통일 전후사를 담은 역사서가 아니다.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을 통해 치국과 경세의 실제 사례를 다루고 있다. 지식보다 지혜를 구하는 우리 사회 ‘의사결정자(decision maker)’들에게 권하고 싶다.


 

2021년 3월

㈜메디치미디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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